초록 

이 연구는 ‘성폭력’의 상징적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의 여성폭력추방운동을 ‘반(反)성폭력운동’이라 명명하고, 역사적인 맥락 속에서 형성된 운동의 특성과 역량을 분석함으로써, 제도화와 자율성에 관한 이항대립적 논의의 한계를 보완하려는 시도이다. 논문의 내용은 1983-2005년에 걸쳐 전개된 반성폭력운동의 역사적 고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운동과 국가의 관계에서 야기되는 제도화의 문제는 오늘날 각 나라의 여성폭력추방운동이 직면한 현실과 관련하여 논란을 빚는 쟁점이다. 제도화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흔히 비가역적인 과정이나 결과로 간주되고 ‘제도화’냐 ‘자율성’이냐의 이항대립의 틀 안에서 논의된다. 그러나 제도화가 이루어지면 여성폭력추방운동이 자율성을 상실한다는 테제가 운동의 발생 맥락이나 형성 과정이 상이한 운동사례들에 동일한 모습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제도화에 대응하는 운동의 역량을 함께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연구는 분석의 전략과 관련하여 제도화의 과정을 상이한 방향의 힘들이 작용하고 긴장과 변화를 내포하는 국가-운동정치의 발전 양상으로 간주하고, 정책에 개입하는 운동세력의 전략적 선택과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주어지는 국가기구의 포섭/배제의 압력을 구분하여 접근하였다. 또한 이런 제도화의 국면에서는 개별 조직보다 운동의 자율성을 뒷받침하는 운동의 역량이 중요하다고 보고, 이를 역사적 맥락의 차이로 말미암아 여성폭력추방운동 안에서 불균등하게 발전하고 상이하게 구조화되는 ‘현장’, ‘담론’, ‘연대’의 특성과 결합에서 찾고자 하였다. 분석에 사용된 자료에는 1983년부터 2005년까지 반성폭력운동에 관여한 조직, 담론, 참여자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 다양한 1차 자료와 심층 인터뷰 자료 외에 정부문서와 신문기사 등이 포함된다. 연구의 주요 내용은 아래와 같다. 

여성폭력추방운동의 핵심을 구성하는 현장, 담론, 연대의 세 가지 차원을 분석적으로 구분할 때, 한국의 반성폭력운동은 현장운동이나 담론정치의 활성화보다 연대 차원의 발전이 선행한 것으로 보인다. 운동의 발생기에 해당하는 1980년대 초반의 한국사회는 군부독재 및 반민주 세력과의 투쟁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1983년에 ‘아내구타 전화상담’을 여성운동의 과제로 삼은 최초의 현장조직이 만들어졌으나, 공권력이 개입된 여성폭력 사건을 공론화하고 함께 대처하는 여성단체들의 연대활동이 먼저 활성화되었고 그 효과는 최초의 현장조직을 포함하는 진보적 여성연대의 구조화와 여성운동연합체의 조기 결성으로 나타났다. 1987년 이후 민주화이행기에는 현장운동이 활성화되고 상담소 조직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지방에 새로 만들어진 진보적 여성단체들은 지역 현장에서 발생한 사건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고, 주부나 사무직 여성들이 참여하는 각종 소모임으로부터 상담소 조직이 분화되었다. 최초의 현장조직을 통해 제시된 상담운동의 레퍼토리가 지역 현장으로 확산되었고, 여성학과 출판 매체를 통해 확장되는 여성주의 인식네트워크 역시 현장조직의 결성과 운동 참여자들의 동원에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운동의 세 번째 차원인 담론정치는 현장으로부터 구성된 의제가 연대조직과 결합함으로써 입법운동이 시작된 1990년대에 들어와 사회적으로 가시화되었으며, 특히 여성주의 인식네트워크의 확장과 새로운 주체들의 참여가 이뤄지는 1990년대 후반에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1990년대에는 과거에 적대적이었던 진보적 여성운동과 국가가 ‘갈등적 협력’ 관계를 발전시키기에 유리한 조건이 지속되었다. 1990년대 초에 성폭력특별법의 제정을 목표로 삼는 입법운동이 여성대중의 호응을 얻으면서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1980년대의 운동공간에서 현장조직과 연대조직의 기반이 형성되고 비록 그 의미의 해석은 다를지라도 운동주체들이 ‘성폭력’의 기표를 공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단체들이 펼친 입법운동은 운동의 이슈가 여성폭력정책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