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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왕의 문화적 재현의 형성-단종과 세조를 다룬 역사소설을 중심으로-

2016년 10월 07일 11시 18분


이 연구는 공화주의 하에서의 문화적 재현 공간(TV 드라마, 영화, 소설 등)에서 왜 여전히 왕이 활발하게 재현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이 의문의 해답을 푸는 열쇠 중의 하나로 최근까지도 문화적 재현의 대상으로 반복적으로 포착된 조선시대의 왕이자 거의 모든 왕의 재현의 원형을 이루는 단종과 세조에 관심을 가지고 이 두 왕이 재현된 양상과 그 방식의 기원으로 식민지시기 역사소설인 이광수의 『단종애사』와 김동인의 『대수양』에 주목한다. 동시에 본고는 왕이 재현되는 방식의 원류를 추적함과 동시에 그 원류가 왜 하필 그 시기에 그러한 방식으로 등장했는가의 문제에도 주목한다. 즉 단종과 세조에 대한 상이한 평가를 수반하고 있는 1920년대 후반에 발표된 『단종애사』와 1940년대 초반에 발표된 『대수양』이 당시의 정치적․문화적․사회적 배경과의 관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도 동시에 제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특히 이는 같은 식민지시기로 인식되지만, 담론 지형이 크게 변별되는 문화통치기와 전시동원기의 정치적 무의식을 분석하고자 하는 시도다.
Ⅱ장에서는 두 근대적 텍스트에서 이루어진 왕의 이미지 재현이 전통적 텍스트에서의 왕의 이미지 재현과 맺고 있는 관계를 밝히려고 한다. 단종과 세조의 재현과 해석의 대립은 세조 집권기 단종복위운동의 주역들을 왕도(王道)의 화신인 사육신으로 상징화하고, 세조를 패도로 비판하며 당시의 정권을 비판하려 했던 사림들과 세조의 즉위를 정당화하려고 했던 공신세력들의 대립으로부터 시작한 유구한 기억투쟁의 과정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는다. 조선시대에서의 기억대립은 현실에서의 정치적인 갈등과 관계 속에서 발전해왔다. 이는 역사의 시비를 밝혀내는 문제를 넘어서 정치집단의 생사를 결정지었던 민감했던 문제였다. 결과적으로는 사림들의 주장대로 국가의 공식적인 행사들 속에서 사육신과 단종은 복권되지만, 왕들이 사육신과 단종을 왕권 강화의 기호로 전유하면서, 세조에 대한 비판은 약화되고, 여전히 단종, 세조, 사육신 등을 둘러싼 해석의 갈등은 잔존하게 된다.
Ⅲ장에서는 Ⅱ장에서 밝혔던 전통적인 기억대립과의 관계와 더불어 담론들이 발표되었던 당대의 담론장과의 관계 속에서 이광수의 『단종애사』에서 나타난 왕의 재현이 가지는 문화적 의미를 탐구한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1928년~1929년 사이 발표된 이광수의 『단종애사』에서 대중적으로 소비된 비극적 왕의 최후는 조선의 마지막 왕이었던 순종의 문학적 장례를 환유하는 측면을 가진다. 조선의 마지막 왕으로 인식되었던 순종이 승하한 식민지에서 『단종애사』는 단종과 사육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세조를 노골적으로 비판하는 전통적인 사림의 서사들의 내용을 차용함과 동시에 이러한 계승을 통해 조선 최후의 왕의 장례를 문학적으로 치러낸 것이다. 특히 이는 전통적인 담론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단종의 슬픔을 극대화하면서 왕을 애처롭게 만들어내고, 그 왕을 떠나보내는 장면의 비장미를 살리면서 이루어진다. 이는 나라를 잃은 조선의 현실을 환기하려는 민족주의적 전략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광수가 왕정복고주의자가 아닌 공화주의자였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그 의미를 한층 복합적이다. 즉 이는 왕을 떠나보내는 의식을 통해 전제 왕정을 공화정으로 대체하려는 정치적 무의식의 표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왕을 주체적으로 처형하지 못 하고 타자에게 잃은 식민지 조선의 공화주의자들에게 왕의 죽음을 공화정의 필연적인 도래와 연결시키는 것은 쉽지 않았던 작업으로 보인다. 특히 일제의 검열이 체계화되고 엄혹해진 환경 속에서 정치적인 모색을 그대로 드러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고, 식민지라는 환경은 서구의 소설들과 동일한 모색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결국 이 텍스트에서 ‘왕정 이후’의 해답은 모호한 것으로 남아있게 된다.
Ⅳ장에서는 1940년대 초 전시 동원기에 출현한 김동인의 『대수양』을 다룬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이 텍스트는 이광수의 『단종애사』가 모호하게 남겨놓은 새로운 질서 모색에 대한 당시 지식인들의 대답을 대표한다. 이 텍스트는 세조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훈구파 및 왕들의 전통적인 입장의 논리를 표면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이렇듯 이 텍스트는 전통적인 정치 담론인 패도를 구현하면서도 동시에 전선기행체험 이후 일제의 강력한 힘에 현혹된 당시 지식인들의 보편적인 세계관을 드러내 준다. 본격적인 전시동원기에 접어들면서 상당수 식민지 지식인들은 민주주의를 비롯한 서구적 가치에 극단적 회의를 느끼고, 일제의 제국적 주체가 됨으로써 파국을 돌파하려고 시도했는데 김동인도 그 전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김동인의 텍스트에서 세조로 표상된 새로운 군주는 전통적인 정치 질서와의 과감한 결별을 선언하고, 대륙으로 확장하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분명히 한다. 그리고 대중들도 강력한 왕에 대한 분명한 선망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역사를 통해 일제의 대륙으로의 침략 의도를 내면화하고 일제의 선전 전략에 적극적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Ⅴ장에서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한다. 이와 더불어 정당하지만 유약했던 왕의 비극적인 최후에 대한 애도와 강력한 지도자에 대한 선망을 각각 대변하고 있는 단종과 세조가 해방 이후의 문화적 재현에서도 끊임없이 반복되어 왔다는 점을 밝힌다. 해방 이후의 문화적 텍스트들은 단종과 세조에 대한 해석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실을 문화적 공간에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는 강박 역시도 식민지시기 역사소설들로부터 그대로 이어받았다. 이러한 왕에 대한 문화적 재현들이 드러내는 정치적 무의식이 실제의 정치적․사회적 구조와 실천들과는 어떤 관련을 맺는지 세심히 살펴보는 것이 추후의 연구 과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