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07일 11시 17분
한때 전체 서울시 주택의 40% 가까이를 보유하던 무허가정착지가 재개발과 함께 대부분 해체되면서, 한국 대도시에는 이른바 ‘슬럼’으로 상징되는 대규모 ‘주거빈곤’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통계청>의 『2005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2005년 현재 서울 일반가구 3,309,890가구의 약 11%에 달하는 355,427가구(총 845,493명)가 (반)지하에 살고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반)지하는 1980년대까지의 무허가정착지를 대체하는 서울․수도권의 대표적인 빈민 주거지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최근까지 한국에서 (반)지하는 그 규모와 함의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학문적 연구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이는 (반)지하라는 주거형태 특유의 비가시성, 그리고 학문적 연구 이전에 (반)지하에 관한 기본적인 실태 파악조차 최근에야 이루어진 사정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반)지하 주거형태를 주거빈곤의 관점에서 문제화하려는 시도들이 꾸준히 진행된 바 있다. 그리고 <통계청>의 『2005 인구주택총조사』를 통해 (반)지하에 관한 최초의 공식 통계가 집계된 이후 관련 통계도 조금씩 축적되어 가고 있다. 아울러 2012년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서울신문』의 신춘문예 당선작이 모두 (반)지하를 배경이나 소재로 삼았다는 점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반)지하에 관한 사회적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 추세다.
이 연구에서는 그동안 여기저기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던 (반)지하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여, (반)지하 주거형태의 형성 과정 및 거주자의 사회경제적 특성을 나름대로 정리하였다. 아울러 신문기사를 중심으로 (반)지하 및 거주자에 관한 사회적 표상을 분석하였고, 이에 기초하여 (반)지하 거주자들의 정체성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에 따라 도출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반)지하는 애초에 1970년대 들어 등장한 새로운 단독주택의 ‘보일러실’ 용도로, 그리고 1968년 이후 강화된 안보적 조치의 하나로 사회적으로 강제된 ‘대피소’ 용도로 출현하였다. 이처럼 본래는 비주거용이었던 (반)지하는, 단독주택이 ‘셋집’이라는 주거형태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다세대를 위한 형식의 주택’으로 탈바꿈해 나가는 과정에서 주거용으로 전용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 들어 기존의 자가주택 건설 일변도의 정책으로는 주택난을 해결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정부는, 임대주택건설 촉진의 일환으로 ‘다세대 거주 단독주택’을 ‘다세대주택’으로 제도화했는데, 이 과정에서 (반)지하는 공식적인 주거형태로 등장하였다. 그러던 와중 합동재개발 정책으로 저렴주택의 재고가 급격히 축소되고 ‘체제위기’로 비화될 정도로 심각한 주택난이 벌어지자, 정부는 이에 대처하기 위해 다세대주택에 이어 ‘다가구주택’ 제도를 도입하고, 다세대․다가구주택 건설을 촉진하기 위해 온갖 지원을 아끼지 않았는데, 이와 함께 (반)지하 역시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한다. <통계청>의 『2005년 인구주택총조사』로 밝혀진 바, 2005년 현재 서울 총 가구의 무려 11%가 (반)지하에 살고 있는데, 이는 1980년대까지 서울 도시빈민의 가장 중요한 거처였던 무허가정착지와 맞먹는 수준이다. 이렇게 볼 때 (반)지하는 오늘날 도시빈민들이 거주하는 가장 중요한 거처로 간주할 수 있으며, 최근 통계들에서 밝혀진 (반)지하 거주자들의 사회경제적 상태도 이런 추정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한다.
둘째, (반)지하에 관한 최초의 신문 보도가 나온 이래 2012년 12월 31일까지 신문에 실린 (반)지하 관련 기사를 분석한 결과, (반)지하에 관한 지배적 표상은 ‘열악한 주거’, ‘고립과 유폐, 절연의 공간’, 그리고 ‘빈곤과 범죄가 만나는 위험한 공간’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들은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내용인 바, 따라서 (반)지하에 관한 사회적 표상은 ‘낙인’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1990년을 (반)지하에 관한 사회적 표상이 형성되는 결정적 시점으로 지목할 수 있는데, 이 해 (반)지하에 관한 기사가 쏟아졌을 뿐만 아니라 위 범주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표상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 이후 10여 년간 (반)지하에 관한 사회적 관심은 수면 아래로 잦아들었으며, (반)지하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표상이 1990년 수준을 회복한 것은 서울에서 유례없는 수해가 발생하고 그 피해가 (반)지하 거주자들에게 집중되었던 2001년이 되어서였다. 2001년 이후에는 (반)지하가 지속적으로 문제화되어, (반)지하에 관한 정책과 실태조사, 그리고 공식적인 통계가 등장하게 된다. 아울러 이른바 ‘88만원 세대’라고 불리는 청년세대의 주된 거처로 거론되는 이른바 ‘지옥고’(반지하․옥탑․고시원)의 하나로 (반)지하가 언급되고, 그와 상관적으로 최근 젊은 예술가들을 중심으로 이 공간에 대한 문화적 형상화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반)지하에 관한 사회적 표상은 더욱 확대․확산되었는데, 이 역시 위에서 언급한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으로 보인다.
셋째, 이렇듯 (반)지하가 지닌 낙인적 성격은 (반)지하 거주자들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중요한 함의를 갖는다. 여러 연구들이 밝힌 것처럼 주거 또는 단적으로 ‘집’(home)은 거주자들의 정체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바, (반)지하라는 주거형태에 결부된 낙인은 그곳에 사는 거주자들의 정체성에 부정적인 효과를 낳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지하 거주자들이 이런 낙인을 그저 수동적으로 수용하지는 않는다. (반)지하 거주자들은 일찍이 고프만이 분석한 것처럼 낙인 또는 ‘손상된 정체성’(spoiled identity)에 대응하고 관리하며 재해석하는 다양한 전략을 구사함으로써, 자존감과 개인적 정체성을 보존하려고 노력하며, 그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이 낙인을 자원으로 전환시키기도 한다. 심층면접을 통해 발견한 (반)지하 거주자들의 대응 전략은, ‘일시화 전략’, ‘거리두기 전략’, ‘신분위장 전략’, ‘무시 전략’, ‘노출 전략’ 등 크게 5가지 정도로 나타났다. 이런 전략의 차이는 거주자가 현재 살고 있는 (반)지하의 주거환경, 기존의 주거 경험․이력, 그리고 서사적 자원 등의 차이에 따른 것이었다.
넷째, 본 연구가 조사대상으로 삼은 (반)지하 거주자들은 흔히 표상되듯 값싼 주거지를 찾아 이리저리 떠도는 ‘유랑민’으로 환원할 수 없었다. 물론 그들이 (반)지하에 살게 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주거비 절감이라는 것, 그리고 대개 세입자 중에서 가장 불리한 처지에 있는 이들로서 (반)지하 거주자들이 ‘비자발적 이주’의 압력에 시달리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반)지하 거주자들은 특정 지역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주하였고, 이는 그들이 이주와 정주의 결정에서 ‘입지’와 ‘관계망’을 중요한 고려사항으로 셈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어떤 의미에서 (반)지하 거주자들은 (반)지하 특유의 열악한 생활조건을 감수하면서까지 이 지역 특유의 입지와 관계망, 곧 모종의 ‘장소성’을 선택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게다가 (반)지하의 주거환경은 주택에 따라 적지 않은 차이가 있다. (반)지하 하면 흔히 떠올리는 채광과 습기, 그리고 수해 위험은 (반)지하라는 주거형태에 필연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수의 (반)지하 거주자들이 열악한 생활환경에 노출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며, 설사 그렇지 않은 경우라도 1980년대 이후 형성된 사회적 담론 안에서 (반)지하 주거형태가 획득한 ‘오명’으로 말미암아, (반)지하라는 주거형태는 대개의 거주자들에게 부정적으로 경험되었고, 이는 그들의 정체성과 자존감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거주자들은 (반)지하를 최선의 경우라도 ‘임시거처’로 의미화했다.
이렇듯 (반)지하에 거주하는 것은 모순적이고 양면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 때 유의할 것은, (반)지하 거주 경험에 고유한 이런 모순을 지워버리고, 이들이 지닌 지역 주민으로서의 정체성, 또는 해당 지역의 ‘장소성’에 대한 고려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반)지하의 문제에 접근하려면, 그 거주자들이 (반)지하라는 주거형태를 왜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