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07일 10시 38분
초록
본 연구는 2000년대 한국에 유행한 “다문화” 담론의 배경을 분석하는 연구이다. “다문화” 담론은 2000년 이후 체류 외국인의 숫자가 급증하고 지속적으로 “세계화” 담론이 힘을 얻는 가운데 정부, 언론, 학계의 주도하에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이주노동자와 결혼이주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정부의 “다문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언론과 학계에서는 한국인의 문화적 폐쇄성과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 “다문화주의”를 권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다문화주의”라는 구호 아래 한국인들이 문화적 차이를 관용하는 감수성을 기르고 외국인에 대해 포용적인 태도를 가져야할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어느 정도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담론들은 추상적 차원에서 윤리적 지침으로서 “다문화주의”를 강조하고 있을 뿐, 현실 속에서 한국인들이 외국인에 대하여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고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 분석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다문화주의”는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 한국인의 시민의식이 넘어가야하는 문턱처럼 제시되었고, 한국은 문화적으로 폐쇄적인 국가이며 서구 선진국가들은 타자성을 관용하는 성숙한 “다문화” 국가라는 단순한 도식이 자리 잡아가고 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다문화” 담론의 배경을 실증적 분석을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외국인”을 구체적인 실체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태도나 성향을 평면적으로 측정했던 기존의 설문조사 분석들과는 달리, 본 연구에서는 “외국인”을 문화적 구성과정을 거치는 하나의 상징으로 파악하고, 이를 상징적 경계(symbolic boundaries)이론의 시각에서 다루고자 한다. 상징적 경계 이론에 따르면 사회적 실체들은 문화적 기호를 통한 구별짓기 과정의 결과물이며, “외국인”과 “한국인” 역시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구성되는 개념들이다. 본 연구는 이러한 구별의 기호들, 즉 “외국인”을 규정하는 기준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한국인의 외국인에 대한 인식, 태도, 행동을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설문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국제비교를 실시하였다. 설문조사자료를 통해 기존의 추상적인 “다문화” 담론에서 벗어나는 실증적인 근거를 얻고자 했고, 국제비교를 통해 한국의 사례를 전지구적인 맥락 속에서 위치지우고자 하였다. 특히 폐쇄적인 한국과 “다문화”적인 선진국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넘어서서 외국인에 대한 구별짓기가 전지구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임을 밝히고, 동시에 이 현상이 보편적인 사회경제적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서로 다른 문화적 기호들을 통해 특수한 형태들로 표현된다는 점도 보이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국제사회조사(International Social Survey Programme) 2003자료를 사용하여 OECD 가입 23개국에 대한 분석을 실시하였다. 국가별 설문조사 자료와 GNI와 지니계수, 실업률 등 국가별 사회경제적 변수들을 연계시켜 각 국가별로 “외국인”에 대한 상징적 경계의 유형과 그 배경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구체적인 분석은 ①국가들을 몇 개의 유형으로 분류하여 그 특성을 살펴보는 퍼지 집합 분석(fuzzy set analysis) ②국가별 차이의 패턴들을 설명하는 위계선형모델(Hierachical Linear Modeling) ③이러한 분석 결과를 실제 역사적 사례를 통해 풍부하게 해석하는 세 단계를 거쳤다.
본 연구의 결과는 모든 국가들에서 다양한 형태의 외국인에 대한 상징적 경계가 발견되며, 이 경계짓기 과정이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대중적인 “다문화” 담론이 전제하는 것과는 달리, 외국인 혹은 외국문화에 대한 관용과 차별은 윤리적 의식의 문제가 아닌 문화와 사회경제적 불평등 구조가 맞물리는 양상에 대한 개인들의 대응방법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이 연구의 결론이다.
또 이러한 분석 과정에서 피부색에 기반 한 인종주의가 만연한 국가들(미국 등), 노동시장에서 “문화”를 매개로한 암묵적인 차별을 제도화시킨 국가들(영국, 스웨덴 등)의 사례들 속에서 한국 사례가 갖는 특수함 또한 드러났다. 기존의 “다문화” 담론이 전제했던 것과는 달리, 다른 국가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한국인들은 외국인들에 대하여 특별히 더 폐쇄적이지는 않다. 한국인들은 종종 외국인에 대하여 상당히 호의적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호의는 외국인들에게 노동자 혹은 아내, 어머니 등과 같은 특정한 역할을 할당하고 이러한 역할을 그들이 효과적으로 수행하는 한에서만 유효하다.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지 않을 때 한국인들은 빠르게 태도를 바꾸어 매우 적대적이고 차별적인 태도를 취한다.
본 연구의 분석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들의 이러한 모순적인 태도는 한국 “다문화주의”의 미성숙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다. 서구의 인종주의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에서도 고유한 사회경제적 맥락 속에서 외국인을 구별짓는 메커니즘들이 발전해왔고, 이러한 메커니즘이 앞서 언급한 외국인에 대한 복잡하고 모순적인 인식과 태도를 낳았다. 그리고 “다문화” 담론은 이러한 모순을 심화시키는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본 연구는 기존의 “다문화” 관련 연구가 놓치고 있는 이민과 그 사회적 결과들에 대한 분석을 행하고자 하였다. 특히 그 중에서도 외국인의 증가라는 객관적 현상이 한국인의 상징 세계에 미치는 영향에 주목하였다. 본 연구는 상징적 경계라는 이론적 시각과 비교 연구라는 방법론을 통해 기존의 “다문화” 관련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한국인이 외국인에 대해 가지는 모순적인 인식과 태도를 심층적으로 이해하고자 시도하였다. “외국인”으로 표상되는 이들과 노골적인 차별이나 암묵적인 배제가 아닌 다른 틀로 관계 맺고자 한다면, 무조건적으로 “다문화주의”를 외치기보다는 사회경제적 차별구조와 그에서 파생하는 모순적인 인식 및 행동을 침착하게 분석하고 대응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 본 연구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