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07일 10시 35분
초록
본 연구는 뤼스 이리가레의 성적 차이 개념과 성별화된 권리에 관한 주장을 검토함으로써 성적 차이 페미니즘이 근대의 보편적 시민권을 어떻게 재구성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가지는 정치적 가능성과 함의는 무엇인지를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먼저,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념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배제했던 근대 시민권을 재구성하려는 페미니스트 시민권의 전략과 한계를 분석한다. 페미니스트 시민권 기획은 크게 4가지로 범주화할 수 있는데, 먼저 젠더-중립적 시민권은 여성의 배제를 극복하기 위하여 여성의 타자성을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여성의 시민권을 기존의 권리에 남성과 동등하게 접근할 수 있는 권리로 한정한다. 여성을 열등한 대상이나 보호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중립(성)적 시민권 전략은 역설적으로 초월하고자 하는 타자성을 부정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여성을 동일자(의 기획 내)의 타자로 머물게 한다. 모성을 중심으로 시민권을 재구성하는 시도는 모성을 문화화하고 사회적인 것으로 승화시킴으로써 모성의 자연화?타자화를 극복하고자 한다. 하지만 남성이 보편적인 기준이 됨으로써 타자화된 모성을 대칭적으로 전도(inversion)하는 시민권 기획은 모성주의가 비판하는 가부장제의 총체화하는 동일성의 논리를 역으로 재생산하며 동시에 여성을 어머니로서 자연화하는 논리 또한 벗어나기 힘들다. 다원주의 시민권 기획은 타자(로서 여성)성을 긍정하며 이를 시민권 기획에 반영하는 장점을 가지나 성적 차이의 보편성 자체를 폐기함으로써 특이성(singularity)과 보편성(universality)을 결합하는 정치의 지평을 닫아버린다. 마지막으로 해체주의 시민권 기획은 성적 차이와 무관한 시민권을 지향함으로써 타자로서 여성뿐만 아니라 주체로서 여성을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차이 속의 평등, 차이를 보증하는 보편성을 어떻게 재구성할 것인가라는 문제는 이리가레의 성적 차이 페미니즘을 관통하는 질문이다. 이리가레는 남성적 동일성에 전유되어 온 여성의 문화적 동일성을 해체하고 새로운 여성 동일성을 발견?구성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초기저작에서 이리가레는 남성중심적 질서에 포획되지 않는 여성의 주체성, 욕망, 섹슈얼리티를 상상, 상징화한다. 단일한 주체(남성 동일성) 모델은 그와 같아질 것인가 달라질 것인가라는 허구적인 딜레마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를, 그녀 자신의 공간을, 특이성(singularity)을 앗아간다. 이리가레는 하나가 아닌 두 주체가 가능하기 위해서, 그/녀가 자연과 문화, 내재성과 외재성, 특이성과 보편성의 관계를 정립함으로써 자신의 공간을 확보하는 이중의 변증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타자로 향하고 다시 자신에게 돌아올 수 있을 때, 즉 두 주체의 동일성이 형성될 때 비로소 관계할 수 있는 둘(의 사이-공간)이 보증될 수 있다. 이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성과 여성, 남성과 남성 사이의 차이를 볼 수 있게 하며, 서로의 교통을 가능하게 한다.
남성과 여성을 하나로 통합하거나 동일화하지 않으면서 자신과 타자에게 향할 수 있는 이유는 성적 차이의 비대칭성에 있다. 비대칭적인 성적 차이는 타자가 나의 복사본이나 대립물로 존재할 수 없음을 의미한다. 나와 타자는 서로의 환원할 수 없는 성적 차이를 통해 '내가 전체가 아니며, 전체일 수 없다‘는 유한성을 인식한다. 타자에 대한 적대나 지양의 의미가 아니라, 나의 젠더의 한계와 타자의 환원불가능성에 대한 인정이 바로 서로 다른 두 존재 간의 ’성적 차이의 변증법‘을 작동시키는 부정(the negative)의 의미이다.
이리가레는 이처럼 둘로 존재하기 위한 과정, 즉 성적 차이를 발현시키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매개가 필요함을 지적한다. 그녀는 후기저작에서 사회정치적 개입을 시도하면서, 인간의 존엄성과 성적 차이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성적 차이의 윤리와 시민적 동일성이 획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적 차이의 윤리는 하나가 다른 하나를 전유?총체화하는 폭력을 지양하는 공동체의 구성 원리이자 전제조건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통치하는 성적 차이의 윤리는 자연의 영역으로 한정되어온 여성이 문화적 매개를 갖는 것, 다시 말해 시민적 동일성의 획득 과정을 수반한다. 사실 성적 차이는 그 자체로 자연과 문화가 연결되고 교통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자연과 문화(정신)의 대립적인 이분법을 설정함으로써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는 결정론은 여성 동일성을 본질화하는 논리를 넘어서지 못한다. 따라서 성적 차이란 자연적인 것 또는 문화적으로 구성된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 자연적 한정성을 문화적으로 매개함으로써 고양되고 발현될 수 있다.
성적 차이의 윤리와 문화적 매개, 즉 시민적 동일성에 대한 요청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두 주체의 형성이 ‘우리’라는 관계, 공동체를 통해서만 확증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리가레가 이중의 변증법을 수정하면서 여성 주체, 남성 주체, 그리고 그들 간의 관계를 의미하는 공동체(또는 커플)의 변증법(삼중의 변증법)을 제안하는 것은 두 주체가 공존하기 위해서 시민윤리적 지평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시민적 동일성은 관계 속에서 양성되고 형성되는 동일성이다. 이러한 시민적 동일성은 공동체 속에서 너와 나를 공존시키는 자연적이면서 영적(정신적)이고, 개인적이면서 집합적인 삶을 확장한다.
여성은 정치의 주체인 시민으로서 여성을 인정하고 유지시켜주는 권리를 보장받음으로써 시민적 동일성을 향유할 수 있다. 성별화된 시민권은 여성이 권리의 보편적인 주체임을 명시함으로써 철회될 수 없는 성적 차이에 대한 권리를 보장한다. 이리가레의 성적 차이의 윤리와 성별화된 시민권은 공동체의 구성을 전환시킴으로써 여성이 여성으로서 시민이 되게 하는 시민적 토대를 마련한다. 커플 또는 가족은 더 이상 자연적?사적 공간이 아닌 시민적 권리를 향유할 수 있고 시민적 동일성을 보장하는 매개이자 기반이 됨으로써 동일성에 대한 폭력을 양산하는 구조를 변혁한다.
이리가레의 성별화된 시민권은 동일함이나 공통성에 기반을 둔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에 근거한 동일성을 보장한다. 가장 보편적이고 급진적인 차이로서 성적 차이에 대한 인정은 자연적 공존과 시민적 공존을 결합함으로써 서로 다른 문화와 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확장의 공간을 보장하는 민주주의 기획의 바탕이 된다. 이처럼 젠더간의 관계를 고양시키는 것은 공동체의 관계를 전환시키는 것이며, 성적 차이는 차이를 공존하게 하는 가장 보편적이면서 가장 구체적인 차이로서 차이의 문화를 창출하고 그 속에서 여성의 특이성을 사고할 수 있게 한다.
여성이 성적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과 시민적 동일성을 획득하는 것은 서로 상관적이며, 동시적인 실천을 요구한다. 가부장제의 가상적, 상징적 구조로 포획되지 않는 여성의 목소리, 언어라는 새로운 상상과 상징화 작업은 여성 동일성을 형성하기 위해, 여성이 주체로서 스스로를 재현하기 위해 필수적이다. 하지만 여성의 특이성, 즉 성적 차이는 ‘나, 너, 우리’ 속에서 이를 고양시키고 매개하는 성별화된 권리와 시민적 토대 없이는 실현될 수 없다. 성적 차이의 시민적 토대의 구성은 여성 동일성에 대한 구조적인 폭력을 제약함으로써 환원할 수 없는 타자의 동일성을 보존하도록 한다. 이리가레가 성적 차이의 상상?상징화에서 정치형태의 변화로 나아가는 것, 그리고 이중의 변증법을 삼중의 변증법으로 전환하는 것은 여성의 주체화가 시민적 동일성의 획득과 필수불가결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로서 여성과 시민으로서 여성의 구성이 동외연적이라는 사실은 이리가레의 시민권 기획(후기 저작)을 초기 저작과의 관계 속에서 읽어야하는 이유이자, 실제 여성의 주체화 과정이 공동체 속에서 매개, 보편화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편적인 것으로서 성적 차이와 성별화된 시민법은 보편성과 특이성을 포괄함으로써 ‘여성인 나’가 보편적인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특수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