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07일 10시 35분
초록
이 논문은 김대중 정부에서 추진되었던 외자유치정책의 기술관료적 성격을 분석하고, 그것이 한국 민주주의에서 갖는 함의를 조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최근 한국에서는 민주화 이후에 역설적으로 다수 사회구성원들의 삶의 질이 더욱 나빠졌다는, 이른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위기’에 대한 담론들이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다. 이 논문도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주목하여,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많은 시민들의 삶이 나아지지 않는 중요한 이유가 기술관료정치가 지배하는 경제정책의 결정과정에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 여러 경제정책 중에서도, 특히 김대중 정부가 구조조정 과정에서 추진했던 외국자본의 유치가 현재까지도 한국사회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 있다고 보고 이를 연구의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이에 따라 이 논문에서는 민주주의의 핵심원리인 대표성과 책임성을 근거로 외자유치정책의 기술관료적 성격을 밝히고자 하였다.
외환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가 추진한 외자유치정책은 IMF가 구제금융의 대가로 보편적으로 요구하는 정책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채무국의 입장에서는 불가피한 것이었다. 그러나 김대중 대통령과 경제분야의 주요 기술관료들은 IMF의 요구 이상으로 외국자본의 유치에 적극적이었고, 위기의 극복과 경제발전을 이유로 외국자본의 유치가 절실히 필요함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부의 행보에 대해 주요 정당과 사회운동세력들은 외국자본의 유치를 당연한 과제로 받아들이고 별 다른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에서 외자유치는 특별한 사회적 토론과 합의과정 없이, 기술관료들의 주도로 신속하게 결정 및 집행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었다.
김대중 정부의 외자유치정책이 기술관료적으로 결정되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 먼저 이 정책은 결정과정에서 민주적 대표성의 원리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았다. 외자유치정책의 결정과정은 선거로 정당성을 승인받지 않은 경제관료기구의 기술관료들이 정책을 입안하고 관철하는 데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민사회의 대의기구인 의회는 기술관료들이 제출한 정책들을 충분히 심의하지 않았고, 대부분 기술관료들의 요구대로 빠른 속도로 정책화하는 것을 승인하였다. 또한 정당과 사회운동세력의 역할도 부재하였다. 외국자본의 유치는 장기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의 경제생활과 연계되는 중요한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시민사회의 일상적 문제들을 정치과정에서 다루어야 할 정당은 이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았다. 사회운동세력 역시 이 정책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그 의도와는 무관하게 소액주주운동과 같은 경제정의운동을 벌이면서 정책의 집행을 보조하기도 하였다. 김대중 대통령과 기술관료들이 경제위기를 이유로 민주적 합의를 생략하고 이 정책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결정 및 집행하려고 했다면, 대의기구들은 이에 대해 토론과 심의를 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러한 정책결정에 동원되는 결과를 낳았다.
외자유치정책은 또한 민주적 책임성의 원리도 적용되지 않았다.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이었고, 개혁적이고 서민친화적인 정책들을 표방해 온 김대중 정부는 집권 이후에 오래 전부터 주장해 온 정책적 입장에서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우선 김대중 정부는 경제정책의 결정에 정권교체 이전의 정부들에서 오랜 경험을 쌓아온 기술관료들을 대부분 재기용하였다. 또 ‘민주적 시장경제’라는 수사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강력했던 경제관료기구들의 권한을 거의 유지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건국 이래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수사로 표현되었던 정권교체의 의미는 축소되었다. 경제팀에 기용된 기술관료들은 시장질서에 대한 적절한 국가개입과 이해관계자들의 정책참여를 허용하는 독일식 ‘사회적 시장경제’를 모델로 삼았던 김대중 정부의 정책적 지향과는 달리, 시장의 자율성과 우선성을 중시하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정책지향을 견지하였다. 이들은 역사적으로 이미 1970년대 후반부터 국가의 역할 축소와 시장의 개방을 꾸준히 주창해 왔으며, IMF관리체제의 도래라는 초유의 국가부도 상황에서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았다. 외국자본의 유치 역시 이들이 1970년대부터 오랫동안 주장해 온 바를 관철시킨 것이었으며, 이런 연속성의 맥락에서 외자유치정책은 민주적 책임성의 원리를 결여하게 되었다.
정책집행의 결과로 대규모의 외국자본이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그것의 경제적 효과는 김대중 정부가 의도한 바와는 다른 것이었다. 한국에 들어온 외국자본 중 많은 부분이 단기적 차익을 노리는 투기성 자본이었기 때문에 처음에 기대한 안정적인 자금공급의 구조는 제대로 마련될 수 없었다. 또 외국자본의 다수가 장기적 투자보다는 적대적 M&A와 주식투자에 치중함으로써 고용창출 역시 그 효과가 미미하였다. 오히려 외국자본이 M&A를 하는 과정에서 해고를 당하는 노동자들의 수가 많아졌고, 외자유치의 조건으로 추진된 노동의 유연화로 인해 비정규직의 비중이 더욱 늘어나는 결과를 얻기도 하였다. 또한 외국자본은 선진적인 경영기법을 국내에 전수하기보다는, 안정성 위주의 보수적 경영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런 결과들은 외국자본의 유입에 대한 김대중 정부의 의도와는 매우 상반되는 것이었다.
외국자본의 영향력 확대로 한국의 정치와 경제는 큰 변화를 겪게 되는데, 우선 자본시장의 자금조달기능이 크게 약화되었다. 외국자본의 투기적 성격으로 인해 이윤의 재투자보다는 배당과 자사주 소각을 통한 주주가치의 극대화원리가 한국경제에서 위력을 발휘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기업들은 투자자금의 조달을 주로 내부자금에 의존함으로써 전체적으로 저투자의 경향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고용의 많은 부분을 담당하는 중소기업들에게 큰 타격을 입혔는데, 이는 고용불안과 소득불평등의 원인을 제공하여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위협하는 요소로 기능하고 있다.
외국자본의 강한 영향력은 민주정치의 불안정성을 심화시키기도 하였다. 외국자본 중심의 경제구조가 마련되면서 정부는 지속적인 유인체계를 제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정책수립에 있어서 민주적 합의보다는 대외신인도의 제고가 더 중요한 기준으로 적용되었다. 발전산업의 민영화나 노동유연화와 같은 조치들이 외국자본에 대한 유인체계로 제공되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공공영역의 해체와 고용불안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사회적 갈등과 대중들의 저항이 빈번해졌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대외신인도 하락과 외국자본의 철수를 근거로 저항하는 세력들을 고립시키고 공권력을 투입하여 갈등을 억누르는 방식을 주로 택하였다. 민주주의적 문제 해결의 첫 걸음은 사회갈등의 활발한 표출과 정치과정으로의 흡수에 있다고 할 때, 사회갈등에 대처하는 김대중 정부의 이러한 태도는 민주주의의 근본적 원칙을 흔드는 것이었다.
결국, 외자유치정책의 사례는 정책결정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원칙이 제대로 적용되지 않으면 그 결과 역시 민주주의에 위협이 됨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기술적 합리성과 전문성을 최우선적 가치로 여기는 기술관료적 정책결정은 정치와 대중을 분리시키고, 정치를 전문가의 영역으로 제한시켜 대중을 자발적 참여주체가 아닌 수동적 존재로 만들어 버릴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되면 대중은 정치를 자신의 삶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게 되고, 이는 정치불신과 민주주의에 대한 냉소로 이어지게 된다. 실제로 기술관료의 영향력이 강한 라틴아메리카의 국가들에서 이러한 현상은 이미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의 위기’가 사회적으로 광범위하게 회자되고 있는 한국사회에 중요한 함의를 제공한다. 이런 맥락에서 기술관료정치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이 요구되며, 기술관료가 주도하는 정책결정을 정당과 같은 대의기구로 통제하려는 제도적 모색과 실천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