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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대한제국기 개신교 윤리의 형성과 성격에 관한 연구-

2016년 10월 07일 10시 23분


초록

종교는 하나의 상징세계로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의 경험을 질서지우고 의미를 부여하도록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가치판단의 기준을 만들어 주고 행위의 방향성을 만들어준다. Max Weber는 이러한 종교의 기능을 잘 포착하였다. 그는 세계에 대한 의미의 해석 작업을 바탕으로 부여된 행위의 방향성을 윤리라고 불렀다. 이러한 종교의 윤리 형성 기능을 한국에 적용하는 것이 이 논문의 저술 동기이다.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서구 종교인 개신교는 한국에 들어왔고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한국에서 개신교가 하나의 종교체계로서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았다면, 여러 요소들과의 결합 속에서 독특한 세계 해석과 의미 부여의 과정을 만들었다는 것을 가정할 수 있다. 그리고 한국만의 독특한 Mentality의 형식들과 행위의 지향성과 윤리를 만들어 냈을 것이라는 가정도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19세기 말 20세기 초(대한제국기)에 한국 개신교의 윤리가 형성되는 과정과 그 성격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분석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 우선, 조선에 개신교를 전달한 서구 선교사들의 신학사상?윤리 사상과 그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 그리고 조선인들에게 전달한 개신교 윤리를 분석하였다. 조선에 온 서구 선교사들은 구원의 문제에 있어 신의 역할을 강조하고 성경을 순수하게 신뢰하는 복음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윤리 사상의 원리적 차원에서는 이들은 개인들의 도덕성과 종교성을 기본단위로 여기는 자원주의를 가지고 있었다. 자원주의가 이들의 윤리사상의 원리적 측면이었다면 금욕과 절제와 성실한 노동을 중요시 하는 청교도 윤리와 가정의 가치와 성적도덕을 소중히 여기는 빅토리아 윤리는 윤리사상의 내용적 측면이었다. 이러한 신학사상과 윤리사상을 가진 서구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문명이 신성한 문명이기에 다른 문명권에 개신교를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동기를 갖고 조선에 왔다.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가진 사상의 잣대를 명확하게 조선에 적용하였다. 그들이 보기에 조선은 아직 발전하지 못한 비문명의 국가였고 매우 비도덕적인 국가였다. 이것들의 원인은 조선인들의 종교에 있었다. 조선인들의 조교인 불교와 유교와 정령숭배 사상은 조선 사람들을 비도덕적 삶으로 이끌고 비문명적인 삶을 살아가게 한다고 그들은 판단하였다. 다만 예외적으로 조선인들의 ‘하나님’ 이라는 개념은 서구 개신교와 유사하다고 판단하여 긍정적으로 해석하였고 적극 활용하였다. 이러한 판단 위에서 서구 선교사들은 조선인들에게 개신교로의 개종을 통해 도덕적인 삶 - 선교사들에게 도덕적인 삶은 청교도 윤리와 빅토리아 윤리를 준수하는 것이었다 - 을 살 것을 강력하게 주문하였다. 그리고 이를 준수하도록 만들기 위해 선교사들은 자신들이 제시한 윤리 조항을 지키는 사람들에게만 개신교인으로써의 자격을 주는 다소 강압적인 방법을 활용하였다. 또한 조선인들의 전통적인 신 관념에 호소한다든지 서구 문명의 우수성의근원이 개신교에 있다고 홍보하든지 하는 방법을 통해 조선인들로 하여금 그것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는 설득의 방법도 병행하였다.

두번째로 개신교를 처음 수용하기 시작한 1890년대의 조선인들의 개신교 윤리 수용의 양태를 분석하였다. 19세기 중반 이전에 조선인들은 화이관에 따라 서양을 ‘오랑캐’로 규정하고 서양문명의 수용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19세기 중반 일본과 중국이 서양 세력의 의해 굴복당하면서 서양의 문명도 수용할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880년대까지는 서양의 기술만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이 우세하였지만 1890년대 중반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화이관이 붕괴됨에 따라 서양의 종교와 지식도 수용해야 한다는 논의가 우세하게 되었다. 이러한 서양문명에 대한 태도의 변화의 과정 속에서 서구 선교사들이 조선에 들어올 수 있었고, 학교와 병원을 통한 간접선교 활동을 할 수 있었고, 교회를 세우고 직접 선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화이관이 붕괴되는 1890년대에 개신교는 본격적으로 수용되기 시작하였다. 이 때 개신교의 수용을 주도한 사람은 조선이 서양문물을 빨리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해왔던 ‘개화파’들이거나 상대적으로 근대 자본주의가 거리가 가까웠던 서북지방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개신교를 서구문명의 중추로 보고 이것을 받아들임으로써 조선이 서구국가들처럼 변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서구 문명으로의 전환이라는 동기 속에서 개신교를 수용한 것이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서구 개신교 선교사들이 제시한 윤리들을 받아들이면서도 이것을 ‘자주독립’한 서구형 민족국가를 만드는데 봉사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개신교 윤리라는 것이 조선인들은 유교의 ‘충(忠)’이나 ‘효(孝)’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조선의 개신교인들은 ‘충군애국(忠君愛國)’을 매우 중요한 개신교 윤리로 상정하였다. 당연히 조선의 개신교인들은 서구형 민족국가 만들기 프로젝트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조선 개신교인들의 특징적 행위가 되었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정치적 개개인의 도덕성과 종교성이 변하지 않으면 근대국가를 만들기 위한 이런 ‘애국적’ 활동을 해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조선인들이 개신교를 통해 ‘자주독립’과 관련된 활동을 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여겼다. 그리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개신교 윤리를 조선인들에게 주입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1900년대 중반 부흥운동을 기획하였다. 이 부흥운동의 기획은 선교사들에 의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이것들이 발생할 수 있는 조건들이 먼저 형성되었다. 신 개념에 인격성이 부여되면서 조선인들에게는 죄에 대한 의식이 생겨났다. 1900년대 초반의 식민지로 전락해가는 역사적 환경이 조선의 개신교인들의 바램과 달리 조선이 점차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가고 있다는 현실과 이를 ‘약자의 죄’라고 말해주는 사회진화론의 도입 또한 좌절감과 죄의식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조선인들은 신을 현세의 주관자로 이해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죄의식을 현세 속에서 벗어버리고 싶어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배경이 되어 서구 선교사들이 기획한 부흥운동은 1900년대 중반 내내 이어지면서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 조선인들은 죄의식을 떨쳐내기 위해 공개적으로 죄를 자백하였는데, 그 내용은 선교사들이 제시한 청교도 윤리와 빅토리아 윤리에 대한 위반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 서구 선교사들이 제시한 개신교 윤리는 내용적 차원에서 조선인들에게 내면화 되었다. 또 자원주의 윤리 원리도 내면화 되어 조선인들은 식민지적 현실이 조선인들이 도덕적이고 종교적이지 못한 탓으로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부흥운동 이후 조선인들은 청교도 윤리와 빅토리아 윤리를 준수해 나가면서 도덕성과 종교성을 고양시키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하지만 윤리 실천의 심리적 동기는 서구와 달랐다. 서구 개신교인들이 내세의 구원의 느낌을 확보하기 위해 현세에서의 합리적 금욕노동을 실천하였던 것과 달리 조선인들은 구원을 현세 속에서 직접적으로 느끼려하였다. 그랬기에 부흥운동 당시에 공개적으로 죄를 자백하여 죄의식을 떨어내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인들의 윤리실천의 심리적 동기는 현세적 성취를 이루는 것 자체를 일종의 ‘구원’이라고 여기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적용되었을 때 조선의 개신교인들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을 일종의 구원으로 상정하였다. 서구적 개신교 윤리의 내용과 원리에 한국 특유의 심리적 동기라는 개신교 윤리의 이중구조가 대한제국기의 역사적 배경 위에서 활동한 선교사와 개신교 수용자들이라는 주체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형성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