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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한센인의 격리와 낙인·차별에 관한 연구

2020년 04월 29일 02시 49분


본 연구는 한센인에 대한 격리제도와 낙인 및 차별의 형성과 변화의 과정을 역사사회학적으로 분석한 결과이다. 한센인에 대한 다양한 차별은 2000년대 이후 이들의 인권과 피해에 주목한 다양한 사회운동, 입법화 과정, 그리고 소송을 통하여 점차 공론화되었고, 일부는 국가로부터 인정받았으며, 또 일부는 피해에 대한 보상금 또는 지원금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한센인 문제의 해결 과정에서 한센인에 대한 격리 문제는 철저히 비가시화되었고, 오히려 격리는 한센병 치료라는 의료복지적 차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본 연구는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의 형성과 유지 그리고 강화에 있어 격리제도가 중심에 있으며, 이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부재할 경우 한센인 인권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문제의식을 갖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연구는 다음과 같은 연구질문에 대한 답을 제공하려 노력했다. 첫째, 한센인에 대한 격리가 형성되고 유지되는 데 어떠한 요인들이 개입했는가? 둘째, 격리제도는 한센인에 대한 다양한 낙인과 차별을 어떻게 생산하고 유지시키는가? 셋째, 강제격리, 낙인 그리고 차별은 어떠한 요인들에 의하여 정당화되었는가? 넷째, 의학의 발전과 사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격리는 어떻게 스스로를 변화시키면서 폐지되지 않고 유지되었는가?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센병환자에 대한 건강인의 대응은 기본적으로 외모의 변형에 대한 심리적인 반응에 근거하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의료지식, 정치 및 사회적 요인들에 복합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었다. 근대 한센병환자에 대한 국가 및 사회의 대응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환자에 대한 격리로, 이는 전근대사회와 확실히 구분되는 것이다. 19세기 말 한센병균의 발견에 근거한 세균설의 발전으로 한센병이 환자를 매개하여 전염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환자를 격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센인에 대한 격리 제도의 형성 과정에는 이러한 의학적 지식과 공중보건학적 요인만 개입한 것은 아니었고, 제국주의나 인종주의와 같은 정치·사회적인 요인도 개입했다. 세균이라는 병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근대 의학지식, 그리고 인구의 관리를 목적으로 한 공중보건정책에 식민지와 피식민지인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제국주의나 인종주의는 한센병의 확산의 예방을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 강제 격리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인식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구현했다. 19세기 유럽 국가들이 자국과 피식민지 지역에서 발전시킨 한센인에 대한 강제격리는 20세기 초 전세계적으로 확산되었고, 조선에는 일본을 통하여 들어왔다.

둘째, 그러나 모든 국가가 강제격리제도를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고, 강제격리에 비판적인 대안이 존재했다. 병인론에 따라 다른 대안도 존재했는데,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의사들과 보건당국은 한센병이 세균에 의하여 발병하는 것은 맞지만 세균이 유일한 병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세균 외에 사회경제적 요인을 동시에 고려해야만 하며, 더욱 중요한 것은 강제격리가 한센병의 확산에 오히려 지장을 초래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반격리주의는 20세기 중반부터 국제 한센병 학계에서 격리주의를 압도하였고, 이후 세계보건기구(WHO)의 한센병 정책의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일본에 의하여 식민지 조선에 도입된 한센병환자에 대한 강제격리는 반격리주의자들의 주장처럼 한센병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기여하기 보다는 오히려 질병을 더욱 확산시키는 모양새를 보였다. 1916년 강제격리제도의 도입과 소록도자혜의원(이후 소록도갱생원)의 설립과 함께 식민지 조선에는 부랑한센병환자들이 급증하게 되었다. 한센병환자 격리시설은 예산 문제로 인하여 모든 환자를 수용할 수 없었으나, 환자에 대한 정책적 사회적 압력은 이들을 거리로 내몰았고, 부랑한센병환자의 급증은 결국 건강인들이 한센병에 걸릴 수 있는 가능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들에 대한 낙인과 차별을 더욱 강화시켰다.

셋째, 한센병환자에 대한 격리정책, 그리고 낙인과 차별의 강화의 주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일부 의료전문가나 보건당국에 제한되는 것은 아니었다. 한센병환자에 대한 격리 정책과 낙인, 차별이 강화되는 과정에서 더욱 중요한 행위자는 일반사회였다. 일반사회는 한센병과 관련된 근대지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으며, 한센병환자를 격리시키는 것을 근대적인 사회로의 발전에 중요한 요소로 생각했다. 이러한 인식에 근거해서 일반사회는 총독부나 한국 정부가 실현할 수 있는 수준보다 더욱 강력한 강제격리제도를 요구했다. 한센병환자에 대한 반감과 한센병에 자유로운 사회의 건설에 대한 일반사회의 욕망은 때때로 통치의 의도보다 앞서나갔으며, 격리제도의 강화에 중요한 추동력을 제공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일반사회의 한센병환자에 대한 낙인과 차별은 치료제의 발전으로 인하여 한센병환자가 완치될 수 있게 된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격리제도가 유지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넷째, 격리제도는 치료제의 발전, 국제보건기구의 개입, 그리고 보건예산의 문제 등의 요소들에 맞서 변화하고 다각화됐다. 효과적인 한센병 치료제인 디디에스제는 1940년대 후반 한국에 도입되었고 1950년대 말이 되면 한센병은 치료가 가능한 질병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강제격리제도가 가져온 다양한 문제들 때문에 국제적으로도 반격리주의의 목소리가 점차 지배적이게 되었고, 이러한 흐름은 WHO를 통해 한국에 강제격리 철폐의 요구로 이어졌다. 다른 한편 한국 정부에 있어서도 강제격리는 엄청난 보건 예산이 소모되는 제도였기 때문에 모든 환자를 수용하는 격리제도는 유지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효과적인 치료제의 도입으로 환자의 치료가 가능해지자 격리제도는 분화되기 시작했다. 1963년 전염병예방법에서 한센병환자의 강제격리 조항들이 삭제되어 음성환자들의 시설 바깥에서의 치료가 가능해졌지만, 양성환자, 음성이 되었지만 장애를 갖게 된 환자, 그리고 다양한 이유에서 사회에서 정착이 힘든 한센인들은 시설에서 퇴원할 수 없었다. 또한 퇴원한 음성환자의 상당수가 “음성나환자촌”또는 “정착촌”이라고 불리는 시설 외부에 있지만 일반사회와 분리된 공간에 모여 살게 되었다. 한센인에 대한 강력한 사회의 낙인과 차별은 정착촌과 일반사회에 강력한 장벽을 만들었고 이로 인하여 정착촌은 또 다른 격리 공간의 성격을 갖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한센인에 대한 격리시설은 사회에 대한 위험 요소를 예방하기 위한 목적 외에 한센병환자의 치료를 담당하는 의료복지적 성격을 갖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운영되는 방식을 보았을 때, 의료복지적 성격은 상대적으로 매우 약함을 알 수 있다. 격리시설의 운영은 매우 비용이 많이 드는 것이며, 정부와 사회에게 시설에 격리된 환자는 예산을 축내는 비생산적인 잉여 인구였다. 때문에 격리시설의 운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산 절감에 있었고, 오랫동안 환자의 복지는 부차적인 것이었고, 예산 절감에 환자의 권리는 얼마든지 양보될 수 있는 것이었다. 예산의 절감이라고 하는 목표는 시설 내부에서 환자의 복지뿐만 아니라 기본권이 매우 쉽게 침해되는 이유가 되었다. 환자들은 자주 적절한 의식주를 공급받지 못했으며, 강제노동에 쉽게 동원되었고, 단종 및 낙태수술을 당했다. 이는 정착촌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정착촌의 한센인들은 한편으로는 지속적으로 보건당국의 관리를 받아야 하는 존재가 되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정부의 도움을 더 이상 받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하는 주체가 되기를 요구받았다. 그러나 한센인을 건강하며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주체로 만드는 과정은 세심히 설계되거나 충분한 예산이 고려되지 않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주체가 되었을 때만 한센인들은 국가로부터 인정받을 수 있었고 지원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주체화 과정 속에서 한센인은 자신에 대한 사회의 낙인과 차별을 유지시키고 오히려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상과 같이 이 논문은 한센인에 대한 낙인과 차별을 격리를 중심으로 분석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격리 그리고 시설화는 한센인뿐만 아니라 부랑인, 장애인, 전염병환자, 빈민 등 사회적 약자를 관리하는 제도로서 점차 보편화되었고, 현재는 정상적인 삶의 궤적 속에서 특정한 국면에 보편적인 제도로서 자리 잡았다. 한국사회의 격리화라고 하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한센인에 대한 격리제도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한센인에 대한 강제격리제도의 도입과 이에 대한 조선사회의 엄청난 지지는 비정상적이라고 여겨진 집단을 사회에서 추방하고, 특정한 공간에 격리시키는 관리 방식을 한국사회에 익숙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더 나아가서는 유일한 방법으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러한 격리화 과정은 근대적 의료 지식에 의하여 정당화되었다. 질병의 단일 병인론은 질병의 발생에 개입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요인들을 비가시화하면서, 환자들을 세균의 매개체로 환원시켜 환자에 대한 격리를 정당화했다. 또한 제국주의, 인종주의뿐만 아니라 우생학과 같은 이데올로기 역시 환자에 대한 격리를 정당화했다. 이렇게 시설을 중심으로 격리된 환자들은 그 내부에서 폭력적인 방식으로 대우받았다. 비생산적인 잉여인구에 대한 보건예산은 낭비로 여겨졌고, 예산의 절감을 위하여 시설 내부의 환자는 시설에 부담이 되지 않는 주체, 그리고 시설에 공헌할 수 있는 주체가 되기를 요구받았다. 그리고 자주 이러한 요구는 환자의 치료나 복지보다 우선되었고, 이는 시설 내에서 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의 원인이 되었다. 한센인 격리에 대한 본 연구의 분석은 추후 이러한 한국사회의 격리화 과정을 분석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