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10일 03시 26분
초록
이 연구의 목적은 해방 이후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한국사회에 근대적 출산조절이 보급되고 일반인의 보편적 실천으로 자리잡기까지의 역사적 과정을 여성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근대적 출산조절이란 효과적이고 안전한 피임 수단을 이용하여 자신의 출산력을 자기 ‘계획’에 따라 조절하는 여성들의 행위를 말한다. 이러한 양상의 출산조절 실천이 보편화된다는 것은 여성들도 일대기 설계와 실현의 주체가 될 조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한국사회에 근대적 출산조절 실천이 보편적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였는데, 이는 한국 여성의 삶의 기회와 선택권의 증대라는 측면에서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 일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출산조절의 보급은 개발국가의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부로 추진된 가족계획 정책/사업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출산조절에 대한 관념 자체가 가족계획사업에 의해 소개된 것은 아니었다. 한국 여성들은 가족계획사업이 실시되기 전인 1950년대부터 이미 강력한 출산억제 욕구를 나타내고 있었으며, 1950년대 말에는 여성에 의한 한국 최초의 출산조절운동인 대한어머니회의 활동이 시작되고 있기도 했다. 이는 한국 출산조절의 역사에서 페미니즘적인 성격을 가진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움직임이었으나,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나고 이후 가족계획사업이 국가정책화하는 과정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가족계획 정책/사업은 과잉인구라는 경제성장의 장애요인을 국가적 차원에서 미리 없애기 위해 채택된 거시적인 국가정책인 동시에, 무계획과 무질서로 규정된 전통적인 출산 관념을 버리고 미리 준비하고 계획하는 근대적 태도를 갖출 것을 권유하는 국민계몽 담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가족계획사업은 부부에게 여건을 따져 자녀출산에 대해 계획을 세우는 근대적 주체가 되라고 요구하면서도, 개인 내지 개별 가족의 자율성 증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출산조절 수단의 신체적 안전성도 거의 고려되지 않았다.
가족계획사업 초창기에는 출산조절에 대한 담론이 불가피하게 연관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준거 때문에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가족계획사업은 가족계획 담론의 틀을 인구의 문제로 이동시키고, 섹슈얼리티와 출산조절 실천을 결혼 안에 밀봉시키며, 구체적인 출산조절 방법과 실천에 대한 정보를 의료화된 전문지식으로 만듦으로써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이는 여성들이 행하는 출산조절 실천의 실상이 공적 담론 속에 드러나기 어렵게 만드는 효과를 낳았다.
가족계획사업은 여성을 사업의 대상 집단이자 수행자로 삼았다. 여기에는 임신과 출산이 여자의 일이니만큼 출산조절 역시 여자의 일이라는 생각이 강고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사업의 여성 수행자들은 실제 사업 추진에 있어 어떤 목소리도 내지 못했다. 남성 관료들과 의사들, 그리고 재건국민운동 출신의 일부 세력이 사업의 ‘구상’ 기능을 독점했으며, 여성들은 하급 수행자로서 구체적인 ‘실행’을 맡았다.
가족계획사업이 실시되는 기간 동안 한국 여성의 출산력 저하는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반드시 가족계획사업의 효과만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여성들이 언제나 출산조절에 대한 욕구를 이미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여성이 가족 내 며느리의 위치에서 인내와 순종과 꿋꿋한 생활력을 가진 존재로서만 살아가던 시절에 국가는 국제 인구통제 레짐이 유포하고 지원한 바 경제발전을 위한 인구통제를 위해 가족계획사업을 대대적으로 추진하였고, 이것이 물 밑에서 꿈틀대던 여성들의 출산조절 욕구와 맞물리면서 결과적으로 급속한 출산율 저하가 일어났다. 한국 여성들의 출산조절 욕구는 근본적으로 외생적인 것이 아니었다.
절대빈곤 상태에 있던 1950년대의 여성들은 자식들을 먹이고 입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고 농업노동과 가사노동을 병행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