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07일 11시 29분
구 유럽 식민지배의 시대를 지나 미국과 소련의 냉전적 대결이 막을 내린 오늘날에는 세계 대다수의 국가들이 주권회복과 독립을 달성했다는 탈식민화 시대의 이미지가 지배적이다. 하지만 그러한 낙관적 언명이 무색하게도, 선진국 주도의 평화재건활동은 소위 실패국가나 취약국가에 대한 공동대응을 전개하는 가운데 서구 민주주의 가치 확산이나 군사적 개입의 정당화에 초점을 맞추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빠르게 확산되어 온 ‘민주화’ 및 ‘국가건설’ 사업에는, 과거 구 식민지의 점진적 독립과 안정적 관리제도로 기능했던 유엔 신탁통치제도를 새로운 정치사법적 모델로 다시금 주목하고 이를 ‘부활’시켜야 한다는 담론이 주된 전제로 자리하고 있다.
본 논문은 이렇듯 하나의 통치모델로 소환되고 있는 신탁통치의 본질과 이를 둘러싼 지배전략을 파악하기 위해, 그것이 최초로 발현된 2차 대전 기간으로 거슬러 올라가 제도의 역사적 형성과 발전 단계를 검토한다. 신탁통치제도에 대한 기존의 국제정치학 연구들은 전시 미국의 식민지 개혁 정책이 초기 구상 단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는 데 합의하면서 그에 대한 역사적 설명을 개진해왔으나, 이를 단순히 미 루즈벨트 행정부의 이상주의적 외교노선에 입각한 일시적인 계획으로 치환함으로써 구상의 구체적인 형태, 논리와 그 본질적 목적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선행 연구들은 구상이 내포했던 다양한 문제의식과 전략들이 2차 대전 종전을 전후로 급변하는 정세와 마주하면서 어떻게 발전, 변형되었는지를 분석하지 못했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본 연구는 단순히 전시 기간과 냉전 기간을 일면적으로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전후의 맥락 속에서 신탁통치구상이 구체화되고 실천되는 맥락을 분석에 포함한다. 특히 구상의 주된 배경으로 작용한 미국의 자유주의 헤게모니가 전 지구적 세력관계의 변동과 현지 지역과의 대응에 따라 변화되어 가는 과정이 곧 국제적 신탁통치의 구체적인 양상의 변형을 야기했음을 보여준다.
본 연구는 상기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국제적 신탁통치구상의 전개과정을 다음의 세 가지 연속적인 국면들로 구분한다. 먼저 첫 번째 국면은 2차 대전 기간 동안 미국이 전후 국제질서의 틀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구 식민지 및 종속지역 문제 처리의 방안을 모색하는 시기를 의미한다. 이 시기 미국은 구 유럽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나 보호통치의 틀로부터 벗어나 국제적‧다국적 기구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지역 관리방식을 고안하고자 했으며, 이는 20세기 초중반 자유주의 헤게모니의 형성과 수립이라는 거시적인 배경을 응축한 것이었다. 이는 또한 당시 가속화된 급진적 탈식민화 흐름에 대응하여, 종속 지역과 그 주민들을 미국의 헤게모니 질서로 포섭하고 현지 사회를 보다 정당화된 방식으로 통치한다는 전략을 반영하고 있었다.
두 번째 국면, 즉 종전 이후 과도기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구상은 실현 가능한 제도적 틀로 구체화되는 동시에, 연합국 간 협조관계의 균열과 한반도 신탁통치 문제의 전개로 인해 당초 기획된 정책기조와 방향이 일정한 변화를 겪게 된다. 그 중에서도 후자의 요인은 국제적 신탁통치의 대표적인 적용 대상이자 유엔의 효용성을 실험하는 공간으로 대두되었던 한반도에서 현지 사회의 정세변동과 미소분할점령의 국면이 심화됨에 따라 구상 자체의 한계와 딜레마가 되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와 관련, 미국의 한반도 신탁통치정책에 대한 국내 역사학계 연구들은 다양한 사료를 바탕으로 그것의 전개과정과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을 분석해왔으나, 한반도와 같은 단일한 사례를 전면에 내세우고 특정한 시간적 범위로 제한함으로써 세계사적, 보편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기획과의 연계성을 풍부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이에 본 논문은 분할점령, 모스크바 3상회의, 탁치정국 등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주목하되, 국제적 신탁통치구상의 성격과 목표가 탈식민화된 사회질서의 형성이 아닌 점령지 내 임시행정과 우호적인 정부수립을 위한 기제로 변용, 굴절된다는 점을 정치사회학적으로 파악한다.
아울러 한반도 사례에서 비롯된 구상의 전환은 국제적 차원에서 더욱 심화된 형태로 나타나는데, 이는 본 연구에서 다루는 마지막 국면에 해당된다. 냉전 초기 미소협조관계의 교착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미국은 자유주의 진영에 속한 국가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신탁통치이사회의 강력한 권한보다는 구 식민모국의 지배권한을 인정하고 그들에 의한 배타적 신탁통치를 용인하는 태도를 보인다. 또한 이 과정에서 미국은 ‘전략적 신탁통치’의 형태를 체계화함으로써 당초 구상 단계에서 전제했던 비군사화의 원칙으로부터 벗어나 특정 지역의 군사기지화와 임시점령행정을 신탁통치의 방식으로 실천한다.
이처럼 ‘탈식민화’ 의제가 소거되어 온 신탁통치구상의 역사적 전개과정을 감안한다면, 현재 세계정세에서 그것의 부활과 재평가를 주문하는 주장들을 재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논의들은 구상 단계에서 국제적 신탁통치구상이 지향했던 이념과 실제 변형되어 적용된 현실 간의 괴리를 간과할 뿐만 아니라, 신탁통치의 방식이 특정 지역에 대한 외적 개입과 임시점령행정을 통해 내부의 정치경제적 제도를 변화시키는 수단으로 활용될 위험성을 배제한다. 본 논문은 이러한 한계에 대한 분명한 인식과 신탁통치 자체에 대한 추가적인 이론적, 법적, 정치적 연구를 통해, 특정 지역의 주권과 실질적인 독립을 현실화할 수 있는 방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