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07일 11시 21분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는 이후 한국사회 자체를 변화시키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였지만, 한국에 대한 연구시각에도 커다란 변화를 야기하는 사건이었다. 이전까지 ‘기적’으로까지 칭송되던 한국의 발전모델은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하루아침에 ‘정실자본주의’의 온상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러한 양 극단의 시각을 화해시키기 위해서는 80년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80년대는 한국 사회에 있어서 일정한 전환기로서의 지위를 갖는다. 즉 한편으로는 60, 70년대 급속한 산업화 과정에서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의 성장이 이루어짐으로써 국가의 자율성이 약화되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한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호혜적인 지정학적 조건들이 해체되기 시작했던 시기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한국의 80년대에 대한 연구는 현재를 이해하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의 80년대를 연구하는 것은 보다 섬세한 접근을 필요로 한다. 10년을 하나의 동질적 단위로 간주하는 언어습관을 이 시기에 적용하게 되면 많은 것들을 놓치게 될 우려가 있다. 다시 말해 80년대를 ‘발전국가의 전환’의 시기로 보는 것이나 ‘신자유주의의 기원’으로 보는 견해들은 분명 타당성을 가지고 있으나, 80년대를 일정한 방향성으로 전개되는 하나의 동질적 기간으로 간주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말이다. 단적으로 80년대를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 보아도 대내외적 조건들에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우선 전두환 정부의 집권 기간은 신냉전의 시작과 탈냉전으로의 전진이라는 극에서 극으로의 국제 환경적 변화가 진행되었던 시기이기에 이러한 냉전의 구조가 한미관계 그리고 한국의 국내 정치경제 상황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예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또한 80년대 전반기의 경제위기 그리고 그에 뒤이은 외채위기의 상황과, 86년부터 시작된 ‘단군 이래 최대호황’이라 불리는 3저 호황의 시기 사이에도 역시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이는 경제위기와 호황이라는 국내 경제 상황의 차이뿐만 아니라 미국의 한국에 대한 정책 변화와도 맞물리면서 보다 복잡한 상황을 만들어 내었다. 끝으로 ‘87년’이라는 기점, 즉 한국사회의 민주화로의 이행이라는 중요한 시점을 전후로 하여도 한국 사회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였다. 본 연구에서는 80년대 전체에 대한 조망을 얻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80년대 초반에 주목하고자 한다. 80년대 초반은 장기간의 박정희 군사독재체제가 종식되고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는 시기였다. 물론 새로운 정권 역시 군부독재정권이었지만 외적 환경, 국가-사회관계, 관료들의 성격 등에서 일정한 변화가 생겨나는 시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변화의 측면과 함께 이전 시기와의 연속성 역시 존재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와 연속성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긴장관계를 보다 정밀하게 분석할 때 우리는 한국의 발전궤적에 대해 보다 정교한 이해를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 연구는 1980년대 초반 한국이 처해 있었던 외채위기의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는지 파악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도출된 결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80년대 초반 한국은 외채위기의 상황에 있었다. 당시 한국의 외채문제는 대단히 심각하였는데, 우선 그 규모 자체가 방대하여 세계 3, 4위의 수준이었고(아시아에서는 1위), GNP 대비 외채총액은 50%를 상회하고 있었다. 또한 신규차입액 중에서 기존 채무 상환에 사용되는 비율인 채무차환율(roll-over ratio)은 1983년 현재 77%에 달해 빚으로 빚을 막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한국의 대외신인도는 급락하였다. 이러한 한국의 외채는 85년까지 계속적으로 증가하여 85년에는 470억 달러에 달하게 된다. 둘째, 이러한 위기의 상황에서 한국의 국가는 경제안정화종합시책을 발표하며 일련의 관련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모두 자본의 반발에 직면하여 무력화되거나 원래의 의도와는 완전히 변형되어 버렸다. 그 이유는 당시의 경기침체 상황과 함께 60-70년대를 통해 성장한 자본의 힘으로 인해 이전과는 국가-사회 관계에서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고, 이와 함께 정당성이 결여되고 부패가 만연한 정권의 성격에서도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셋째, 한편 1980년대 초반 한국에서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고 외채위기가 발생하는 시점은 세계적 차원에서 70년대 초중반의 데탕트가 쇠퇴하고 ‘신냉전’이 고조되는 시기였다. 미소관계가 악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란, 니카라과 등 제3세계에서 혁명이 발생하는 신냉전의 상황에서 미국은 한반도의 인권이나 민주주의보다는 신군부와의 밀착을 통한 한반도의 안정을 추구하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은 신군부에게 신속한 승인과 지원을 제공해 주었고, 더욱이 한국, 미국, 일본에서 새롭게 등장한 전두환, 레이건, 나카소네는 지도자 차원의 파트너십을 형성하면서 동아시아 냉전연합을 구축하게 된다. 넷째, 이러한 국제적 배경 속에서 한국에서 여러 가지 지원을 받게 된다. 미국 수출입은행의 지원을 필두로 체이스맨하탄 은행 회장, 시티뱅크 회장 등의 방한하여 한국에 차관을 빌려주었고, IMF, 세계은행과 같은 국제기구들도 지원을 해주었다. 특히 IMF, 세계은행은 자금 지원을 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과는 달리 가혹한 구조조정이나 워싱턴 컨센서스를 강요하지 않았다는 점도 중요하다. 그리고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 속에서 나카소네 일본 수상이 일본 수상으로는 최초로 방한하여 40억 달러에 달하는 대한국 차관을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모든 지원들은 다시금 한국의 대외신용도 제고에 큰 도움을 주었다. 다섯째,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1980년대 초반 한국의 외채위기는 국내적 조정에 의해 극복되었다기보다는 계속된 자금지원을 가능하게 해준 당시의 지정학적 요인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본고의 결론은 1980년대 초반에 국한하여 적용되어야 하지 한국의 발전궤적 전체에 적용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본고의 연구 대상 시기인 80년대 초반의 앞 시기인 박정희 정권기와 뒷 시기인 80년대 후반 이후의 시기에 대한 정밀한 분석은 향후의 과제가 될 것이다. 끝으로 본고의 결론은 비교사회학적 분석의 가능성을 제기하는데, 공간적으로는 동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의 비교, 시간적으로는 1980년대 초반 한국의 외채위기와 1997년 한국의 외환위기의 비교가 그것이다. 우선 동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의 비교를 통해 동아시아는 냉전의 최전선에 위치하여 자본주의 진영의 쇼윈도로 전시되는 지역이었는데 반해, 라틴아메리카는 지정학적 고려보다는 훨씬 더 미국의 직접적인 경제적 이득이 우선시되는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토지개혁과 다국적기업의 침투정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1980년대 초반 외채위기와 1997년 외환위기의 비교를 통해, 1980년대 초반 외채위기 시기에는 신냉전이 고조되는 상황이라 미국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1997년 외환위기 시기에는 냉전이 끝난 상황에 동아시아적 발전모델을 종식시키고자 하는 미국의 의도 속에서 한국은 지원을 받지 못하고 가혹한 구조조정을 경험하게 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80년대 초반 외채위기의 ‘극복’요인이 지정학적 요인에 기인한다고 하여 97년 외환위기의 ‘발생’원인이 지정학적 요인에 있다고 이야기하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97년 외환위기는 복잡한 국제적 국내적 상황이 맞물려 돌아가면서 발생한 것이고 미국은 단지 80년대 초반에는 해주었던 지원을 97년에는 해주지 않았을 뿐이다. 여전히 위기 자체를 초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