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07일 11시 20분
오늘날 우울증은 단순히 은유로서의 질병을 넘어서서 시대를 표상하는 상징이 되어버린 듯하다.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울증상을 호소하는 환자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우울증과 관련된 정보가 홍수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과거 정신질환과 정신과 방문에 대하여 가해지던 사회적 편견과 낙인은 점점 효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우울증은 반드시 전문의와의 상담을 통하여 약을 복용하야 하는 마음의 감기로 자리매김하였다. 본고는 이와 같이 오늘날 발견되고 있는 우울증 서사의 폭발 현상에 대한 의문을 바탕으로, 한국사회 우울증 담론에 대한 문헌 연구를 시도하였다.
연구는 크게 세 가지로 구성되었다. 첫째로는 우울증의 사회적 구성으로, 서구사회에서 우울증이 언제부터, 누구에 의하여, 어떤 과정을 통하여 오늘날의 정신 장애로 정의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사실 우울증은 역사가 매우 짧은 질병으로서, 19세기에 디프레션(Depression)이라는 심혈관계 용어가 기분의 저하 상태를 지칭하는데 사용되기 전까지만 해도 멜랑콜리(Melancholy)라고 불렸다. 우울증상, 우울감 등을 지칭하는 멜랑콜리는 고대 그리스로부터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며, 무기력함, 게으름, 식욕 저하와 같은 신체적 현상뿐만 아니라 예술가적 기질의 원천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서구정신의학의 발달과 크레펠린, 프로이드의 영향으로 멜랑콜리는 이내 디프레션으로 대체되었고, 특히 미국정신의학에서 발간하는 『정신장애에 대한 진단 및 통계 편람』에 의하여 오늘날의 정신 장애로 재정의 되었다. 한국사회에서는 서구정신의학을 수용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울증이라는 단일 질병명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오늘날 우울증을 진단하는데 고려되는 다양한 증상에 부합하는 명칭만이 부분적으로 발견된다. 이후 서구정신의학은 조선 말기에 부국강병을 위한 신문물의 일환으로 적극 수용되었지만 우울증은 상대적으로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고, 식민지 치하에 있던 1930년대에 지식인층에 의하여 멜랑콜리에 대한 논의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사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
우울증이 오늘날과 같은 정신 장애의 일종으로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이후로, 국내 정신의학계 내의 전문가집단에 의하여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정신의학계 내 전문가집단은 오늘날 통용되는 우울증 담론을 형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무엇보다도 사회구성원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우울감의 집단적 발현 현상을 우울증이라는 정신 장애로 명명하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본고에서는 생의학적 관점에 기초한 우울증 담론이 전문가집단에 의하여 형성되는 과정(의료화)을 살펴보기 위해서 국내 정신의학 학회지에 수록된 우울증 관련 논문의 내용을 체계적으로 분석하였다(『신경정신의학』 124건, 『우울·조울병』67건, 총 191건). 그 결과, 국내 정신의학계에서는 서구-특히 미국 정신의학계의 경향을 그대로 수용하고 흡수하여, 우울증 담론을 발전시켜왔음을 알 수 있었다. 우울증 관련된 논의는 대부분 우울증의 생물학적 특성과 약물 치료의 효과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이와 같은 경향은 2000년도에 들어서도 지속적으로 이어져왔다. 약물 치료에 대한 강한 신뢰는 국내 의약시장 내 항우울제 시장의 형성을 유도하였고, 다국적제약회사와 국내 제약회사 간의 제휴를 바탕으로 국내 항우울제 시장은 2000년도 이후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2013년도 현재 국내 항우울제 시장 규모는 약 1500억원대 안팎으로 추산되고 있으며, 국내 제약회사 간의 점유율 경쟁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다.
국내 정신의학계 내 전문가집단을 중심으로 형성된 우울증 담론은 이후 정부의 정책 방향과 부합되면서 사회 전반에 걸쳐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정부에서는 나날이 증가하는 자살행위에 대한 국가적 개입 및 관리의 일환으로, 2005년에 <자살예방 5개년 세부추진계획>을 발표하였다. 당시 이 계획안에는 자살 행위의 80%가 우울증을 거쳐 일어나기 때문에, 현재의 여건상 변화시키기 힘든 원래의 원인(생물심리학적, 사회경제적)보다는 자살에 이르는 길목에 자리 잡은 우울증을 조기발견하고 치료함으로써 자살률을 낮추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입장이 담겨 있다. 이 같은 우울증-자살 간의 연관성은 앞서 우울증의 생의학적 모델이 구성된 정신의학계에서의 논의를 바탕으로 하며, 따라서 계획안은 사회구성원의 정신건강 및 우울증 관리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짜여졌다. 계획안은 이후 대대적인 수정을 거쳐 2008년에 <자살예방 5개년 종합대책>으로 다시 발표되었으며, 우울증을 주요 대상으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여전히 주요사업으로 명시되었다. 현재 <자살예방 5개년 종합대책>은 진행 중에 있으며, 정신의학계에 대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지와 정부-민간 단체 간의 협동을 통해 우울증과 관련된 정보가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우울증이 일상적인 담론으로 자리잡기까지는 미디어의 적극적인 역할 수행도 한 몫을 했다. 미디어는 일반 대중에게 우울증에 대한 정신의학계와 정부의 입장을 전달함으로써 우울증을 반드시 조기치료를 받아야 하는 마음의 감기로 자리매김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실제로 우울증 관련 보도기사는 정부 계획이 시작된 2005년도 이후 급증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우울증 담론은 전문가집단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형성된 생의학적 모델이 정부의 본격적인 개입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2005년도 이후 급속도로 확산된 것으로, 담론의 확산이 우울증의 탈낙인화 및 전문화를 이끌어내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의 우울증 담론은 생의학적 모델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지속적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우울감정의 집단적 발현이라는 사회 현상을 설명하는 주도권을 정신의학계가 쥐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학적인 입장에서 보면 질문의 방향은 달라진다. 즉 왜 우울감정의 집단적 발현이 일어나고 있는가, 무엇이 그토록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가에 대한 사회구조적 모색으로 관점을 옮겨가는 것이다. 현재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기조는 사회구성원으로 하여금 생존을 최고의 가치이자 덕목으로 추구하도록 구조적 압박을 가한다. 이제 개인들은 생존을 위하여 끝없이 자기 자신을 착취하고 계발하는 성과주체로 자리매김한다. 문제는 성취하고 이루어내야 할 대상의 미완결성이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개방성과 미완결성은 성장에 유리하기 때문에, 개인은 결코 완결된 형식의 성취를 마주할 수 없다. 개인은 끊임없이 자신을 능력화 해야 하고, 자신의 능력 있음을 증명해나가야 한다. 이 미완결성을 향해 달려가는 개인이 결국 기력이 다하여 고갈되고 소진되는 것, 육체적·심리적 경색. 우울은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실제로 오늘날 우울증을 호소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우울증상을 유발한 명확한 계기가 존재한다. 그리고 도태된 자, 실패자로서의 극심한 자기비하가 나타난다. 더불어 생의학적 관점에 기초한 우울증 담론이 신자유주의 구조 내에서 생물학적 생존 기술의 일종으로 간주되면서 더욱더 개인화된다. 개인은 생존을 위하여 한편으로는 자신의 정신건강까지도 적극적으로 관리해야만 하는 필요성에 직면한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근래 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치유문화의 확산에 의하여 더욱 강화된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발견되는 우울증 담론의 확산은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마주하는 부정적인 경험들을 문제화하는 의료화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또한 우울증을 유발하는 근본적인 원인이 사회경제적 요인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구조가 문제의식을 사회구조적 요인으로 돌릴 수 없도록 운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울증을 예외적인 질병 상태─적극적인 개입과 처방을 통해 나을 수 있는 ‘마음의 감기’가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적 반응─좌절, 절망, 우울감으로 바라보고 분석을 진행해야 할 것이다. 본고는 바로 이와 같은 접근을 위한 일련의 시도로, 우울증 담론과 연관된 기존의 생물심리학적 요인이 아니라 사회구조적 요인에 더욱 주목하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