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07일 11시 20분
본 논문은 정부의 정보 기술 정책에 변화하는 기술적․사회적 환경과 행위자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한 재귀적 지식의 생산이 동반되는 과정을 조명하고자 한다. 재귀적 지식을 생산하는 제도들이 근대 이후에 현저하게 확산된 것이 관찰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해져가는 사회적 상호작용과 행위자의 인지적 능력 사이의 간극을 배경으로 한다고 할 때, 정보기술을 둘러싼 기술 공급자, 중개자, 소비자 사이의 상호 작용이 규모․복잡성․속도 면에서 고도화된 정보 사회에서 정보 기술 정책의 입안 또한 같은 문제에 직면해있다. 한국의 기술 정책에 대한 기존 연구들은 이런 인지적 간극에 마주한 행위자들이 정책의 대상이 되는 기술에 적용될 이름, 정의, 상징을 정하기 위한 상호작용을 거듭해 왔음을 보였지만, 이러한 이름, 정의, 상징이 기술과 사회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한 지식을 생산하려는 체계적 시도의 일부일 수 있다는 점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에 본 연구는 재귀적 지식이 행위자와 세계의 상호작용을 설명하는 지식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설명하는 대로 둘의 관계를 구성하기 위한 수행적 발화의 체계일 수 있다는 전제에 기초하여, 정보 기술 정책을 보조하기 위한 지식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세계에 대한 특정한 설명 방식이 획득할 수 있는 영향력에 주목하고자 하였다.
본 연구의 대상인 한국 정부의 ‘빅 데이터’ 정책은 다양한 종류의 정보 기술 정책 중에서도, 정보 기술의 개발을 지원할 뿐만 아니라 이 개발된 기술을 직접 적용하여 정부 조직 전반을 변화시키려고 했던 정책의 일환으로 2011년 10월에 처음 제안되었다. 정책 특유의 재귀적 성격 때문에, 이러한 일련의 정보 정책들은 이전부터 다양한 공공 연구기관을 통해 정책 지식을 생산해, 해당 정책이 복잡한 기술적․사회적 세계의 상호작용을 거쳐 정부에게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를 미리 알고자 해왔다. ‘빅 데이터’가 인터넷 환경 및 이동 통신 기술을 비롯한 변화에 의해 촉발된, 규모가 크고 복잡하며 축적 속도가 빠른 데이터를 의미하면서도, 이를 분석하기 위한 새로운 기술과 인프라, 유통하기 위한 매체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담당하는 실행 공동체까지 맥락에 따라 선택적으로 지칭하는 ‘이름’이기도 할 때, ‘빅 데이터’의 전체상을 파악하는 것은 곤란한 인지적 작업이다. 이 난해함은 ‘빅 데이터’ 정책을 위한 활발한 재귀적 지식의 생산을 불러일으켜, 이전부터 정책지식을 생산해 오던 한국정보화진흥원을 비롯한 다수의 공공 연구기관이 참가하였다. 하지만 ‘빅 데이터’ 정책지식은 과거와의 연속성보다, 현실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들을 다국적 정보 컨설팅 기업으로부터 빌려왔다는 불연속성 때문에 본 연구의 주목을 받았다.
다국적 정보 컨설팅 기업은 ‘빅 데이터’라는 말을 기술적․사회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요약해 제시하기 위한 하나의 이름으로서 사용하는 설명의 체계를 구축해왔다. 다국적 정보 컨설팅 기업은 점차 복잡해지고 빨라지는 정보 기술의 변화를 분석해 지식의 형태로 제공함으로써, 기술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빅 데이터’의 경우, 정보 컨설팅 기업은 ‘빅 데이터’의 정의와 데이터․기술․행위자를 분류하기 위한 모델을 포함한 개념적 도구들과, 수많은 분야의 조직 안과 밖에서 가치 있는 데이터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서베이 결과와 수치 자료를 사용하여 세계를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설명은 하나의 프레임을 형성하여, 이 프레임 안에서 행위자로서의 조직은 분석에 필요한 데이터와 기술을 외부로부터 구매하는 개인화된 시장적 행위자로, 행위자를 둘러싼 세계는 자원 창고로 그려진다.
한국의 정책지식 생산 과정에 다국적 정보 컨설팅 기업이 ‘빅 데이터’란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장치들이 들어왔을 때, 정보기술 정책에 대한 이해는 정보 컨설팅 기업의 프레임을 닮아가는 쪽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빅 데이터’ 정책에 대한 연구는 정부 조직이 보유하고 있는 데이터를 매개로 정부 조직 간의 관계, 그리고 정부․시민․기업 간의 관계를 설정하기 위해 이루어졌던 과거의 연구와 연속성을 갖는다. 하지만 동시에 과거의 정책지식이 전제하던, 시민을 주축으로 한 행위자들이 데이터 활용법을 고민하기 위해 만들어낸 집합적 협력 관계는 ‘빅 데이터’ 정책지식 안에서는 시장적 거래 관계로 변화하였다. 동시에, 지식이 상정하는 세계 속에서 소비자와 기업만 남고 시민은 배제되었다. 두 가지 상이한 정책지식이 동일하게 정책의 모델로 상정하고 있던 사례에 대한 해석도 완벽하게 갈라져, ‘빅 데이터’ 정책은 행위자로서의 정부와 기술적․사회적 환경 사이의 재귀적 관계에 대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이해에 기초하게 되었다.
물론, 다국적 정보 컨설팅 기업이 만들어낸 ‘빅 데이터’의 프레임이 정책 지식의 생산 과정에서 항상 안정적으로 작동하지는 않았다. 정책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에서 다국적 정보 컨설팅이 제공한 설명의 장치들의 타당성이 의심되거나 다른 것으로 교체되기도 하였다. 특히, 정부를 포함한 개별 행위자가 데이터와 기술을 구매할 수 있다는 행위 모델과, 세계를 구매 가능한 데이터 자원의 창고로서 그리는 시각에 의문이 점차 의문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빅 데이터’ 프레임이 들어오면서 배제되었던 집합적 관계에 대한 강조와 상호작용의 현장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복귀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빅 데이터’ 이전과는 변형된 의미를 가지고 돌아와, 정부가 참여할 집합적 상호작용은 데이터 자원을 둘러싼 시장에서 더 많은 자원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을 의미할 뿐, 과거와 같이 데이터 활용법을 고안하기 위한 협력적 관계는 여전히 고려되지 않았다. 의문이 제기된 결과 ‘시민’ 또한 정책 지식 안으로 돌아왔으나, 과거와 같은 참여의 주체가 아닌 잠재적인 데이터 자원으로서의 지위만을 가지고 있었다. 데이터를 자원, 더 나아가 자본으로 보는 시각, 그리고 자원의 취득을 세계 내 행위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보는 시각은 변화하지 않았으며, 이는 다국적 컨설팅 그룹이 고안해낸 설명이 항상 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지만, 특정한 프레임 속에서 생산되던 정책지식은 비록 의문이 제기되었더라도 그 영향력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의 ‘빅 데이터’ 정책지식이 재구성되는 과정은 하나의 특수한 사례인 동시에, 정보 기술은 물론이고 다양한 기술의 변화에 대응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공통적으로 고려해야 할 지점을 제시해준다. 공공 연구기관을 통한 정책지식의 생산 외에도, 보험 회사, 미래학, 기술 영향 평가를 비롯한 다양한 채널을 통해 재귀적 지식의 생산과 유통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는 기술에 관한 의사결정이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가는 현실의 거울이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특정 지식이 선택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고, 추후에 그것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있으나, 선택의 결과로부터 완벽하게 벗어나기는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