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07일 10시 25분
초록
개별 기업이 지배적인 기업의 형태일 것이라는 일반적인 상식과는 달리 기업집단이야말로 전세계적으로 보편적인 기업형태이다. 그들 가운데 재벌이라는 기업집단 형태는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가 빚어낸 역사적, 제도적 산물로서 매우 특이한 형태를 가지는 것으로 지적되어 왔다. 이 특이성을 기업의 지배구조라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한국의 재벌 총수들은 순환출자, 피라미드 출자와 같은 방법을 통해 재벌 내의 몇몇 핵심적 계열사의 지배권을 확보하게 되면 나머지 계열사들의 지배권 역시 거의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다는 점으로 압축된다. 이는 오랜 기간 동안 한국 기업지배구조의 특징을 관통해오던 원리였다. 그러나 97년 말의 아시아 금융 위기와 그에 이은 국제통화기금(IMF)의 구제조치는 이러한 재벌들의 지배구조원리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어긋난 개혁 대상으로 간주하였고 한국 정부는 1998년부터 재벌에 대한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실시하려 하였다.
한국 경제가 금융 위기의 충격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벗어났다는 평가를 받는 2005년 현재, 몇몇 상위 재벌들은 구제금융 이전보다 훨씬 더 성장하였고 더 높은 명성을 얻고 있으며, 나머지 재벌들 역시 1997년과 1998년의 위기와는 사뭇 다른 안정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겉으로 보이는 안정적인 양상과는 달리, 그의 이면에는 새로운 형태의 불안정성이 지배구조를 둘러싸고 발생하고 있다. SK그룹과 소버린 자산 운용, 현대그룹과 KCC그룹 간의 경영권 분쟁은 적은 자본으로 그의 수십 배에 달하는 전체 그룹을 지배할 수 있었던 한국 재벌의 지배구조원리가 이제는 역으로 외부로부터의 위협에 노출된 아킬레스건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다시 말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효율적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었던 원리가 시장 개방이라는 환경의 변화로 인해 위기 및 위험의 원인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과거의 지배구조원리에 비추어 한국 재벌들은 현재 어떤 조직구조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 외부의 위협에 대한 그들의 대응은 향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인가? 본 연구는 환경 변화에 대한 행위자의 대응 및 변화라는 연구 관심을 배경으로 삼아 한국 재벌의 지배구조상의 변화과정을 네트워크 이론에서 제시한 여러 개념들을 통해 살펴보려 한다. 그러기 위해 본 연구는 행위자로서의 연결망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행위자로서의 연결망이라는 개념은 기업가 1인 혹은 소수에 의한 의사결정이 전체 기업집단에 중대한 영향을 주는 기업 연결망을 일컫기 위해 도입된다. 이는 1997년부터 2003년까지의 재벌 출자 연결망 데이터를 사용하여 재벌의 기업지배구조를 네트워크 지표를 통해 구체화된다.
최근 사회학계에서 관심을 끌고 있는 네트워크라는 개념은 이론적으로, 방법론적으로 매우 풍부한 함의를 사회학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전반, 그리고 여타 학문 영역에까지 제공하고 있다. 이 개념은 노드(개체, 주체)와 링크(관계, 연결)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개념에서 출발하여 행위자들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들이 맺고 있는 관계는 내, 외부의 환경 변화에 따라 각기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계량화해서 보여줄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노드(Node)를 계열사로, 링크(Link)를 계열사간의 출자로, 그리고 방향(Direction)을 출자의 방향으로 설정하였다. 노드와 링크의 관계와 강도를 통해 도출된 네트워크의 속성은 네트워크 이론 상의 두 지표, 삼자 위계성(Transitivity)와 지위비(Status Ratio) 지표를 통해 재벌 출자 연결망의 구조적 특징으로 나타난다. 지위비와 삼자 위계성의 두 척도를 사용하여 본 논문은 1997년에서부터 2003년까지 한국의 29개 재벌집단의 지배구조의 변화를 추적한다.
연구의 결과는 한국 재벌집단의 지배구조가 과거에 비해 지위비와 삼자 위계성이 감소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오고 있음을 보인다. 본 연구에서 사용된 회귀방정식은 어떤 요인들이 두 변수의 감소에 영향을 주었는지를 검증한다. 다른 한편, 이 가운데서도 몇몇 재벌들의 지위비와 삼자 위계성은 두드러지게 약하였는데, 이들이 실제로도 2000-2005년 사이 그룹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에 얽혀 있었음이 본 연구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한국 재벌의 지배구조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지를 조심스럽게 진단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