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10일 03시 42분
초록
한국전쟁기 수많은 비무장 민간인들이 대량학살되었다. 그 가운데 ‘보도연맹 사건’으로 개전 직후 약 3-4개월 동안 전국에 걸쳐 약 10만 명에 가까운 보도연맹원이 목숨을 잃었다. 전선에서 계속 패퇴하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 자국민에 대한 학살이었다. 당시 이승만정부는 보도연맹원을 전시 내부의 적이자 외부의 적과 내통할 수 있는 ‘빨갱이’로 인식했다.
‘빨갱이’는 이승만정부 ‘사상통제’의 운용 결과 양산되었다. ‘사상통제’는 원래 일본과 그 식민지에서 출현한 ‘사상문제’에 대한 대응으로 나타난 역사적 개념이었다. ‘사상통제’는 좁게는 과격하고 위험한 특정 사상에 대한 통제, 넓게는 ‘사상’ 자체의 금기시를 의미했다. 그런데 ‘사상’은 개인의 마음속에 위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상’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개인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일제는 그것을 위한 매뉴얼과 도구로서 세계사적으로 유례없는 사상통제기제를 구축했다. 그리고 그것은 해방 이후 한국의 사상통제기제로 변용되었다. ‘빨갱이’는 이 사상통제기제의 효과로서 탄생한 존재였다.
이 논문은 한국 사상통제기제의 역사적 형성과 ‘보도연맹 사건’을 연구대상으로 삼아 사상통제기제의 역사적 계보와 작동 및 그 효과를 분석하고, 그것이 ‘보도연맹 사건’으로 어떻게 귀결되었는지 규명하고자 했다.
1) 여기에서 사상통제기제란 세 가지 요소들 사이의 네트워크를 의미한다. 이 네트워크는 크게 두 가지로 구성된다. 하나는 사상통제법과 사상통제기구 간의 네트워크이다. 기존 연구들이 ‘사상통제법체제’로 포착하는 부분이다. 다른 하나는 그 사상통제법체제와 관변사상동원단체 간의 네트워크이다. 관변사상동원단체는 사상통제법체제가 양산한 ‘사상범’을 전향시키고 관리․동원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이다. 사상통제법체제는 개인의 마음속 사상을 판단해 처벌했고, 전향시켰으며, 보호를 명분으로 감시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 권력기술을 통해서 그들의 몸을 규율화해 몸과 함께 정신을 동원한다. 단체원들은 그렇게 ‘배제된 채 포섭’된다. 사상통제기제의 작동 효과는 이런 위치의 존재들을 양산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상통제기제 작동의 임계를 넘어가는 상황이 발생할 때 이 존재들은 언제든 ‘배제’의 문턱을 넘어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 임계상황이란 전쟁상태이다. 그나마 전방이 국외에서 형성되는 국외전쟁 상태에서는 국내후방의 사상통제기제가 임계로 치닫지 않는다. 그러나 전방이 국내에서 형성되고 국내의 전장화가 빠르게 확산되면, 그래서 적이 도처에 존재한다고 가정되는 ‘내전상태의 전장화’가 도래하면 사상통제기제는 임계를 넘어서 불능상태로 치닫는다. 그 결과 단체원들은 내부의 적으로 간주돼 절멸되어야할 ‘절대적 적’으로 상정되고 이를 정당화시키는 절멸 이데올로기가 강화된다. 이런 특정 조건에서 사상통제기제는 학살기제로 전화되고, 단체원들에 대한 대량학살이 발생하게 된다.
2) 이러한 사상통제기제가 일제시기에 역사적으로 형성되었다. 1925년 4-5월에 일본과 식민지 조선(과 대만, 사할린)에서 성립된 치안유지법 제정이 그 시작이었다. 치안유지법은 일본에서 최초로 ‘국체’를 법조문에 기입한 법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사법의 철칙인 행위 ‘결과’를 두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목적’을 판단해 처벌하는 최초의 법이었다는 것이다. 즉 치안유지법은 국체변혁 행위 ‘결과’가 없어도 어떤 결사조직 행위만을 가지고 변혁 ‘목적’과 자의적으로 결부시켜 처벌하는 법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 법은 세계사적으로도 유일무이한 ‘사상처벌법’이었다. 이후 치안유지법은 두 차례 개정을 통해 ‘사상처벌법’에서 ‘전시법’으로 발전해갔다. 신치안유지법(1941)은 사상범 보호관찰 법령(1936)과 예방구금 법령(1941), 전시 방첩을 위한 국방보안법(1941) 등 사상 및 방첩 관련 법령들을 전시 치안유지법계열로 구성해갔다.
사상통제법은 국가기구 내 사상통제를 전문으로 하는&am